딴생각

경술국치일, 우리는 지금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내 마음대로 해석중 2026. 8. 29. 15:24

경술국치일, 우리는 지금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2026년 8월 29일은 제116주년 경술국치일이다. 1910년 경술년 이날, 대한제국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겼다. 116년이 지난 지금, 한국 사회는 이 날을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조기 게양, 찬 흰죽 먹기, 상기행사, 태극기 달기 캠페인. 형식은 다양하지만 그 중심에는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기억은 지속되고 있는가, 아니면 반복되고 있는가.

찬 흰죽 한 그릇이 전하는 것

올해 경술국치일을 앞두고 가장 많이 보도된 행사는 광명시와 광복회가 공동으로 진행한 '찬 흰죽 먹기'였다. 여러 언론이 동시에 이 행사를 보도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신호다. 나라를 빼앗겼을 때의 민중이 느꼈을 허기와 서러움을, 차갑게 식은 흰죽 한 그릇으로 몸으로 기억하게 하겠다는 발상이다.

행사는 광명시와 광복회가 함께 주관했으며, 선열의 희생과 독립의 의미, 주권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취지로 진행됐다고 보도됐다. 찬 흰죽이라는 소재는 거창하지 않다. 그러나 그 단순함이 오히려 힘을 가진다. 역사를 관념으로만 다루지 않고 감각으로 체험하게 한다는 점에서, 이 행사는 기억의 방식에 대한 하나의 실험이기도 하다.

조기 게양, 가장 오래된 기억의 형식

경술국치일에 태극기를 조기로 게양하는 것은 법적 근거를 가진 공식 기억 행위다. 서울특별시는 국기게양일 지정 및 국기 선양에 관한 조례에 따라 이날 조기 게양을 시행하고 있으며, 경남도는 도내 민관 전체에 조기 게양 동참을 요청했다. 게양 시간은 오전 7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며, 자정까지 게양을 권장한다는 안내도 확인됐다.

조기 게양은 한국 사회가 경술국치일을 기억하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넓게 퍼진 방식이다. 그런데 이 행위가 얼마나 자발적으로, 얼마나 의미 있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조기를 게양하는 손이 그날의 역사를 알고 있는지, 아니면 단지 안내문을 보고 따르는 것인지는 수치로 확인하기 어렵다. 그래서 조기 게양 독려 공지가 해마다 반복되는 것일 수도 있다.

경남에서 열린 상기행사, 그리고 150여 명

경남에서는 제116주년 경술국치일을 맞아 상기행사가 개최됐다. 경남도는 독립유공자 예우와 선양을 강화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으며, 행사에는 150여 명이 모였다고 보도됐다. 순국선열의 정신을 기린다는 취지 아래 진행된 이 행사는, 지역 단위의 기억 실천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150여 명이라는 숫자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크다고 할 수도, 작다고 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숫자가 아니라 행사의 밀도일 것이다. 나라를 잃은 날을 기억하기 위해 시간을 내어 한자리에 모인다는 행위 자체가 이미 하나의 선언이다.

SNS에서의 기억, 공지와 각성 사이

소셜미디어에서 경술국치일이 언급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조기 게양 방법을 안내하는 공식적·반공식적 공지형 게시물이고, 다른 하나는 이날의 역사적 의미를 개인의 언어로 풀어내는 기억 공유형 게시물이다.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을 통해 지방자치단체, 의원실, 일반 계정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8월 29일을 기록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백범 김구 선생을 경술국치일과 함께 호명하는 게시물들이다. 유네스코가 올해를 김구 탄생 150주년 기념해로 공식 지정한 해에, 8월 29일이 김구 선생의 생일과 경술국치일이 겹친다는 사실이 다시금 주목받았다. 나라를 잃은 날에 태어나 나라를 되찾기 위해 살다 간 인물을 이날 함께 기억하는 방식은, 역사에 사람의 얼굴을 붙이는 작업이기도 하다. 또한 유튜브에서는 경술국치일을 '나라도 숲도 빼앗긴 날'로 표현하며 인문학적 시각으로 접근한 콘텐츠도 공개됐다.

기억의 실천들이 공통으로 묻는 것

찬 흰죽, 조기 게양, 상기행사, 태극기 달기 캠페인, SNS 공지. 이 기억의 실천들은 형식은 달라도 공통적으로 한 가지를 묻고 있다. 이 날을 알고 있느냐는 것이다. 경술국치일은 광복절처럼 공휴일이 아니다. 특별히 챙기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는 날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날을 기억하는 행위에는 언제나 약간의 능동성이 필요하다.

각 지자체와 기관이 조기 게양을 '당부'하고, 뉴스가 찬 흰죽 행사를 반복 보도하고, SNS 계정들이 저마다 기억을 공유하는 이 풍경은, 사회가 기억을 유지하기 위해 매년 일정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증거다. 기억은 저절로 보존되지 않는다. 반복되어야 살아남고, 몸으로 체험되어야 깊어진다. 찬 흰죽 한 그릇은 그래서 단순한 행사 아이템이 아니다. 기억을 감각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다.

116년이 지난 지금, 경술국치일을 기억하는 방식은 이전보다 다양해졌다. 그러나 기억의 다양성이 곧 기억의 깊이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조기가 걸린 창문 앞에서 그날의 의미를 떠올리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그것이 매년 이 날이 돌아올 때마다 남는 물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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